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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1920s

에어스트림(*캠핑트레일러)의 첫 시승은 1929년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의 실제 탄생은 월리 비암(Wally Byam)이 처음 집을 떠났을 때였다. 월리의 유년기 삶-학교교육, 항해, 캠핑, 그리고 일하기 등-의 비전은 광활하게 열린 길을 달리고 야외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비전은 모델 T 섀시(chassis)위에 세운 텐트 속에서 실현되었다. 한 소년의 꿈은 그 속에서 학교수업을 받는 것을 통해 이루어졌다. 월리 비암이 첫 트레일러를 만든 이래 실현된 이 꿈은 오늘까지도 여전히 살아있다.
월리와 닐

월리는 스탠포드 신문사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졸업 후 그 경험이 LA 타임즈에서 일자리를 구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스탠포드 대학 시절, 광고 매니저로 일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페니 신문사 그룹이라는 새로운 회사에 합류하기 위해 광고 일을 그만두었다. 그 회사는 코넬리우스 “닐” 밴더빌트 주니어(Jr.)가 세운 것으로, 월리와 닐은 그곳에서의 첫 만남과 협력을 계기로 평생지기 친구가 되었다.
스스로 만든 사람

월리 비암이 생애에서 이룬 모든 성과는 자신의 피나는 노력과 끈기를 통한 것이었다. 월리는 1921년 스탠퍼드를 졸업했는데, 당시 자신의 가족이 학비를 보태지 않았더라면, 이에 대한 기록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는 여러 개의 일을 하면서 자신의 대학공부를 감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재학기간 동안 월리는 스탠포드 미식축구 게임과 야구 경기가 열릴 때마다 구내매점에서 일한 것은 물론, 시그마 치(Sigma Chi)라는 남학생 사교클럽의 관리자로 일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여름방학 동안 항해사로 일하면서 돈을 벌었는데, 바다에서 보낸 그 시간이 월리로 하여금 여행을 사랑하고 넓은 세상을 경험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을 뿐 아니라 에어스트림(캠핑트레일러)의 초기 디자인들 일부에도 큰 영감을 주었다.
첫 번째 에어스트림

1929년, 월리 비암은 세계 최초의 에어스트림 트레일러를 만들었다. 그 시초는 모델 T 섀시 위에 세워진 진기한 텐트모양의 고안 장치로 시작했으나, 비가 올 때는 큰 재미가 없었다(월리의 첫 부인 마리온조차 그의 팬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 텐트를 눈물이 떨어지는 모양의 영구 거주공간으로 대체하고, 난로와 아이스박스를 추가하였다. 이것은 여행객들의 눈을 사로잡고, 그들을 이끌기에 충분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월리에게, 이것을 아예 아주 잘 나가는 비즈니스로 개발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질문을 던지곤 했다. 멋진 일을 해낸 것이다.

1930s

1930년대가 밝아오자, 월리 비암의 초기 트레일러 디자인은 커다란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밀려오는 수요를 자신의 집 마당에서 제작하거나 혹은 전국의 주문고객에게 5$ 사용설명서를 보내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첫 에어스트림을 보자마자, 시승해 보기를 원했다. 드디어 공장 하나가 문을 열었다. 트레일러가 첫 선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경제 대공황이 모든 것을 암울하게 만들었다.
취미생활에서 비즈니스로

월리의 인기 있는 이 장비가, 트레일러 제작으로 대성공을 거둔 후, 그가 이 수익성 높은 비즈니스로 뛰어든 것은, 자신의 이웃들이 월리의 앞마당에 있는 트레일러를 자기들에게도 만들어 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서, 마음에 두기 시작했다. 제작에 따른 소음불만이 제기되자, 월리는 건물 하나를 임대했고, 1931년 캘리포니아 쿨버 시에 작은 트레일러 공장 하나를 연 것이, 바로 에어스트림의 첫 번째 공장이었다. 공장은 금방 이전되었지만 에어스트림에 대한 꿈은 자라고 있었다.
트레일러 붐-그리고 파산

월리 비암이 캘리포니아에 첫 에어스트림 공장을 열었을 때, 그곳에는 트레일러 제작을 사업체로 등록한 곳이 50개가 넘지 않았다. 그 후 5년 동안, 트레일러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요구가 폭발적으로 커져, 이 산업은 1937년까지 크게 성장함에 따라, 무려 400여개의 제조사들이 고객확보 쟁탈전을 벌였다. 불행히도, 무모하게 뛰어든 제조사들의 상당수가 경제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문을 닫았고, 오늘날에는 에어스트림만이 생존해 있다.
토르페도(*어뢰란 이름의 모델)의 첫 공개

위대한 유산들이 도처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에어스트림에게 그것은 토르페도(*어뢰를 장착한 모양의 모델)사업이었다. 토르페도는 공장에서 만든 에어스트림의 첫 모델이었고, 1932년 초에 이르러 약 1000대 가령의 토르페도가 길 위를 누비고 다녔다. 곧이어 실버 뷸릿(Silver Bullet)社와 실버 클라우드(Silver Cloud)社가 합류하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포장도로와 오프로드 상에서 보는 것처럼, 토르페도가 모든 에어스트림 트레일러 가운데 선두를 달렸다.

1940s

에어스트림은 경제대공황에도 살아남았다. 2차 세계대전은 또 다른 도전이었다. 공장들이 문을 닫고, 월리 비암과 다른 이들은 전쟁에 참가했다. 종전 후, 에어스트림은 다시 돌아왔고, 이전보다 더 발전했다. 회사가 성장함에 따라, 월리는 자신의 전쟁 테스트용 트레일러에 시승할 기회를 가졌으며, 이것이 캐러밴(*이동식 주택) 혁명을 낳은 씨앗이었다.
THE WAR YEARS

진주만 습격사건 이후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가했을 때, 알루미늄 사용은 (입법을) 통과하기 힘들게 되었다. 정부는 여행 트레일러를 전쟁에 쓰일 목적 외에, 일반인들의 여가사용으로는 허용되지 않도록 규제했던 것이다. 월리는 에어스트림을 여행의 모드로 보았을 뿐, 대용 주택으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상점 문을 닫기로 결심했다. 전쟁기간 동안, 월리와 상당수 에어스트림 종사자들은 캘리포니아에서 다양한 형태의 항공기 제조사들이 일군을 뽑는다는 고용소식을 접하였다. 그들이 쌓은 군용기 근무경력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에어스트림과의 인연을 끊게 만들었다.
첫 번째 모험

1948년, 월리는 자기 친구 닐 벤더빌트와 함께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유럽에 갔다. 닐의 목표는 순례 강연을 통해, 전후 유럽에 관한 영화를 찍는 것이던 반면, 월리의 목표는 여전히 에어스트림이었다. 그들은 에어스트림 트레일러를 끌고 유럽 대륙을 횡단했다. 월리는, 수리할 필요가 있는 취약점 발견을 포함해, 개선점 보완을 위한 노상 실험(road test)을 감행했다. 이것이 당시 일차 계획은 아니었지만, 그 여행은 몇 년 후 시작하게 될 에어스트림 캐러밴 개발의 전조였다. 이 두 친구가 길 위에서 함께 달리다니,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커티스 라이트 클리퍼(Curtis Wright Clipper*쾌속 여객기)

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면서 월리 비암은 전쟁 지원을 위한 비행기 제작에 도움을 주고자 커티스 라이트社에서 일했다. 종전이 되면서 하나의 기회를 잡았다. 그들은 유동기어 시설을 하나 갖고 있었고, 이를 토대로 트레일러 비즈니스로 복귀했다. 커티스 라이트 클리퍼가 탄생했는데, 이는 여러 면에서 에어스트림 클리퍼와 닮은 것이었다. 하지만 월리의 신기술 제조방식 비결이 적용되어 많이 개선되었다. 이것이 월리의 첫 번째 비행기 형태의 트레일러였다. 그것이 에어스트림의 마지막은 아니었다.

1950s

1950년 대, 에어스트림은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주로 좋은 쪽으로의 변화였다. 옛날 공장들은 쓸모 없게 되었다. 월리 비암은 처음으로 미국 국경 밖에서 이동주택 주민들을 선도했다. 회사 안팎에서 혁신이 계속되었다. 10년이 지날 즈음, 에어스트림은 다방면에서 발전하여 여행용 트레일러 회사에게는 하나의 운동으로, 심지어 수 천 명이 공유하는 하나의 문화로 발돋움하였다.
첫 번째 캐러밴

1951년, 월리 비암은 여러 명의 친구들과 함께 텍사스에서 니카라과까지의 여행을 결정하였다. 잡지사들이 이 이야기를 다루기 시작하자, 그는 LA 타임즈에서 다른 사람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초대하였다. 그는 약 35대의 트레일러가 등장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실제는 63대가 참여했다. 첫 번째 캐러밴은 오늘날의 에어스트림 사용자가 느끼는 것처럼, 그다지 부드러운 승차감을 주지는 못했다. 열악한 도로사정과 악천후는 그 장비를 실패로 이끌어 가면서, 많은 캐러밴 여행객들이 하나 둘 경기를 중도에 포기했다. 오직 14 팀만이 완주했고 월리는 이런 행사를 다시 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투표는 고작 일 년 동안만 유효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당신이 지속적으로 도전하고자 할 때, 혁신은 불가피하다. 사람들이 에어스트림 트레일러를 새롭고, 보다 도전적인 현장으로 끌고 나갈 때, 그들은 더 많은 필요를 느낀다. 월리 비암은 기존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사람들이 필요로 할 때, 그들이 그것을 만들어내도록 채근하면서 혁신을 계속해 나갔다. 1954년, 그는 트레일러에 온수 시스템을 개발하도록 보웬 온수회사의 회장 마크 보웬을 설득하였다. 1957년 에어스트림 인터내셔널은 창사 이래 처음 ‘자급자족 형’ 여행 트레일러를 개발하였다. 그것은 외부 트레일러 연결부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형태로서, 외부전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새로운 기능을 갖춘 에어스트림은 어느 때보다 장수할 전망이었다.
동쪽으로의 이동

1952년, 에어스트림은 LA생산시설을 폐쇄하는 대신 확장이 절실했다. 월리는 서부연안에만 머물기보다 중서부를 건너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동부로 여행했다. 그는 오하이오 주 잭슨 센터에서 세일을 위한 공장을 찾기 전, 일리노이 주 인디애나와 오하이오에서 여름을 보냈다. 닐 벤더빌트와 동행한 에어스트림의 승승장구에 힘입어, 자금 마련이 쉬어짐에 따라, 월리는 이상적인 두 번째 장소 물색에 성공했다. 위대한 선택의 순간이었다. 50년이 훌쩍 지난 후, 에어스트림은 여전히 잭슨 센터에서 트레일러를 만들고 있다

1960s

창사 이래 30년 동안-어쩌면 더 길게-에어스트림과 월리 비암은 동의어가 되었다. 1960년대는 이것을 바꾸었다. 월리가 세상을 떠나면서 에어스트림은 설립자와 지도자를 동시에 잃은 것이다. 한바탕 소요가 일었고, 변화가 불가피했지만, 월리가 평생을 바쳐 이룩한 이 회사와 아이디어가 이토록 위대하고 강하게 존속하리라는 점에는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전설이 지나가다

월리 비암은 특유의 강인함으로 암과 투병했음에도 불구하고 1962년 7월22일 세상을 떠났다. 여행, 모험, 그리고 세상을 직접 경험하기 위한 그의 꿈과 노력의 소산을, 많은 사람들이 누리게 하기 위해, 그는 정상에 있던 에어스트림 회사를 남긴 채 하늘나라로 갔다. 월리의 보좌역이던, 아트 코스텔로와 앤디 찰스 간의 경쟁을 거쳐, 1년 후 코스텔로가 에어스트림의 새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현실에서 동떨어진 세계

1969년 인간이 처음 달을 방문했을 때, 많은 이들은 달 표면을 걸었던 우주비행사들이 질병이나 기타의 병폐를 가져오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NASA가 모든 예방조치를 한 이후 아폴로 11호의 세 우주비행사들은 안전한 귀환에 즈음하여 검역이 실시되었다. 이때 에어스트림은 “모바일 검역 장치”를 만들도록 위임 받았고, USS Hornet(*항공모함)에서 닐 암스트롱, 버즈 알드린, 마이클 콜린즈가 인사하기로 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이 세 우주비행사들을 향해 말을 건네는 당시 리차드 닉슨 대통령의 유명한 사진도 보인다.
거대한 변화

1969년, 에어스트림 트레일러는 30년 만에 처음으로 내/외부를 개조한 구조적 변경을 통해 디자인의 중요한 변신을 도모했다. 최종결과는 둥근 가장자리와 유선형 모양으로 변신한 것으로, 아주 고급스럽고 안락한 내부, 그리고 보다 차별적인 총알 모양이 특징이었다. 게다가 발 하나의 길이가 추가되었고 넓이는 4인치가 늘었다. 이는 거대한 변화로서, 월리가 처음 만든 트레일러에서 오늘날 도로상에 다니는 것으로의 변신이었다.

1970s

석유 파동과 위기로, 1970년대의 자동차 산업은 전반적으로 크게 발전하지 못하는 대신, 여행 트레일러와 에어스트림만은 약진을 계속했다. 재미를 위한 드라이빙이 더 이상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이것이 에어스트림의 변신을 자극했다. 창사 이래 최초로, 캘리포니아를 떠났다. 개선을 위한 행보였다. 신제품들이 소개되면서, 에어스트림은 그 어떤 것과 다른 차별화를 시도했다. 온 세상을 변화시킨 유동에서 살아남은 것은 에어스트림밖에 없었다
또 한 번의 확장

1950년대 후반, 에어스트림은 기존의 중서부 공장 근처, 오하이오 주의 잭슨 센터의 4 에이커를 구입했다. 1971년 이곳에 씨앗 하나가 심겼고, 그로부터 세계 최초로 가장 근대적인 트레일러 공장이 세워졌다. 150,000제곱미터에 이르는 크기의 새롭고 거대한 이 시설은 오늘까지 잘 작동하고 있으며, 처음 문을 열었을 때처럼 트레일러를 대량생산하고 있다

확산

처음 40년 동안, 혹은 에어스트림 역사 전체 동안, 우리는 독보적인 여행 트레일러 회사였다. 월리 비암은 모터로 움직이는 집에 대해 여러 번 생각해보았지만, 결정은 매번 반대였다. 1974년 모든 게 변했다. 효자상품 하나에만 의존하는 것을 피하려는 리더십 아래, 아르고시(Argosy) 모터 주택이 출시되었다. 판매는 고만고만했지만, 아르고시 (생산)라인은 1979년에 끊어졌다. 그러나 후속 모델인 랜드 요트 모터 주택(Land Yacht motorhome)과 각 주를 넘나드는 여행버스(Interstate touring coach)개발을 향한 혁신의지는 그치지 않았다.
함께 돌아오다.

1970년대 후반, 중동의 석유파동과 위기가 미국의 운전자들을 강타했음에도 불구하고 에어스트림은 예전과 동일했다. 잭슨센터의 시설확장과 통합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에어스트림은 동부로 이전하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캘리포니아 공장은 1978년에 문을 닫았고, 모든 제조라인과 실제 작동은 오하이오 단지로 이전하여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1980s

윌리 비암의 타계 이후, 에어스트림은 또 한 번의 안정적인 행보를 내디딘다. 새로운 소유주가 들어 와 오늘날까지 성공시대를 이끌고 있다. 아이콘 창출을 위한 트레일러 재 부흥 방안을 토대로, 우리는 옛 것과 새것을 동시에 유지할 수 있었다.
새로운 관리체제

에어스트림의 리더십은 월리 비암의 죽음 이후, 몇 십 년 간 여러 차례 운영진이 바뀌면서, 수 년 동안 굴곡을 경험하였다. 1980년, 다시 한번 안정을 찾았다. Hi-Lo 트레일러의 소유주인 웨이드 톰슨과 피터 오트웨인은 시장상황이, Thor Industry라는 새로운 회사 설립과 에어스트림을 합병하는 쪽으로 기우는 것을 보았다. 그러한 합병 상황은 30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하나의 아이콘이 되다.

에어스트림 트레일러의 디자인과 그 아름다움이 많은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고, 향후 몇 십 년 동안 미국의(그리고 세계의) 캠프장소와 도로를 누빔으로써, 에어스트림은 그저 신기한 물건이라는 이미지에서 미국의 진정한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예를 들어볼까? 1987년 Money 잡지는 에어스트림 트레일러를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99개 중, 하나로 선정하였는데, 이는 코카콜라와 하인즈 케첩과 같은 공룡기업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은 회사 아닌가?
새로운 땅으로의 모험

월리 비암 캐러밴 클럽 인터내셔널은 1950년대 즈음부터 존재해 왔다. 그 시기는 월리가 첫 캐러밴을 출시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하지만 1970년대와 80년대에 이르러, 그들은 전 세계의 다양한 캐러밴 업체 간 제휴를 이루고자 에어스트림 본사와 합병하였다. 심지어 일부 미국인들은 당시 현장을 방문하는데 열심을 내지 않았다. 리차드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한지 10년이 지난 1985년, 에어스트림의 캐러밴은 처음으로 중국에 발을 내디뎠다

1990s

에어스트림이 시대의 획을 그은 회사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당신이 보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항상 미래지향적이다. 1990년대, 우리는 세대 간 격차를 줄일 수 있었다. 에어스트림의 위대한 역사적 자원, 모든 트레일러들을 영광스럽게 보존하기 위해 새로운 노력을 기울였다. 더 많은 제품과 향상된 디자인, 에어스트림의 완전한 신세대 모델이 노상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옛 것을 보내고

에어스트림과 트레일러의 우수한 품질과 장수(longevity) 덕분에, 몇 십 년 혹은 그 이상을 써도 끄떡없음을 알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에어스트림 구 모델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오리지널의 영광을 복원하는 동시에 유서 깊은 전통과 현대성을 접목하기 위해 개조작업이 뒤따랐다. 이 요구를 채우기 위해 1993년, 월리 비암 캐러밴 클럽 인터내셔널에는 새로운 장이 열렸고, 빈티지 에어스트림 클럽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여기에 합류하기 위해, 소유주들은 최소한 25년 이상 된 트레일러 하나쯤은 갖고 있어야 했다.
옛 것이 새 것이 되다.

라인을 따라 구르는 새로운 트레일러의 경우, 주요 디자인은 1969년 이래 큰 변화가 없었다. 1994년 30년 만에 처음으로 새로운 디자인이 선 보였다. 폭이 5.5 인치 넓어졌고, 인테리어도 전반적으로 새롭게 바뀌었다. 프로필, 구조, 외관의 변화에 발맞춘 이러한 수정은, 성능은 그대로 유지하되, 더 커지고, 보다 안락한 트레일러로의 변신을 꾀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당신이 길 위에서 보고 있는 에어스트림이다.
새 것을 맞이하며

에어스트림의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것 외에도, 1990년대는 새로운 여행객 세대를 맞이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젊은 구매자들의 기호에 맞는 사파리 모델이 소개되었다. 에어스트림이 요구하는 품질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경쟁사 제품 대비 20%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었다. 무게 면에서도 전통적 트레일러보다 20% 정도 가벼워서 경차가 견인해도 가능할 정도였다. 대단한 인기였다. 에어스트림 판매의 거의 절반 정도가 사파리 모델이었다.

2000s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거의 한 세기 동안 에어스트림 트레일러가 도로를 점령해 왔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월리 비암 캐러밴 클럽 인터내셔널과 에어스트림이 중요한 이정표를 지나면서,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하고 있다. 우리가 항상 미래를 지향하면서 신제품을 개발하고, 더 좋은 트레일러와 다른 제품을 생산하려는 이유다. 이를 통해 에어스트림 사용자들은 아무 걱정 없이 편안하게 광활하게 열린 도로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반세기 공동체

2005년, 월리 비암 캐러밴 클럽 인터내셔널은 50주년을 자축했다. 첫 번째 센트럴 아메리칸 캐러밴 이래, 월리는 자신의 모험을 유럽에까지 확장했고, 닐 벤더빌트는 미국 전역을 넘어 아프리카와 중국에까지 여행하였다. 또한 WBCCI 역시 반세기 동안 에어스트림 동호인들을 결집하여 지속적인 유대감과 추억을 나누면서, 안전하고 즐겁게 세계 구석구석을 여행하였다.
가족의 증가

2000년대 에어스트림은 전망 좋은 트레일러를 제공하는 역사에 큰 획을 긋게 된다. 베이스 캠프 트레일러에서 각 주를 여행하는 코치coach*중대형 버스로 돌아오는 클래식 모터 가구에 이르기까지 에어스트림이라는 이름 아래 이용할 수 있는 다양성은 모두 경험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일부 모델이 나왔다가 사라졌지만, 품질과 혁신에 대한 헌신은 결코 식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에어스트림이 존재하는 이유다.
길 위에서 75년

이듬해, 에어스트림은 75주년 생일을 맞았다. 새로운 디자인이 세월의 검증 대 위에 올랐는데, 리벳(대갈못)으로 고정한 알루미늄 구조물이 그것이었다. 회사의 장수비결은 우리가 세운 트레일러 한 대 한 대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2006년, 월리 비암이 첫 번째 트레일러를 만든 이래, 에어스트림의 65%가 아직도 도로를 누비고 있다. 그 노련한 전사들 가운데 일부는 월리가 첫 번째 공장을 열기도 전에 팔았던, 이른바 5$ 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것도 간혹 눈에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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